제2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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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1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알프스 횡단, 칸나이 전투에서의 대승, 그리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에서의 활약이 주요 내용이다. 전쟁은 자마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며 종결되었고,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를 상실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로마에 종속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의 지중해 패권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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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에니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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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제2차 포에니 전쟁 | |
개요 | |
주요 분쟁 | 포에니 전쟁 |
시기 | 기원전 218년 봄 – 기원전 201년 |
장소 | 서부 지중해 |
결과 | 로마의 승리 |
로마의 영토 변화 | 카르타고령 이베리아 정복, 카르타고 아프리카 영토 축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동부 누미디아 시라쿠사 (기원전 218–215) 기타 |
교전국 2 | 카르타고 시라쿠사 (기원전 214–212) 서부 누미디아 기타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마시니사 파비우스 쿤크타토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기타 |
교전국 2 지휘관 | 한니발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시팍스 기타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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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시기 | 기원전 219년 – 기원전 201년 |
장소 |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
결과 | 로마의 승리 |
참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Carthage standard.svg|12px]]카르타고 안티고노스 왕조 시라쿠사 |
교전국 2 | [[파일:Spqrstone.jpg|20px]]로마 |
주요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파일:Carthage standard.svg|12px]]한니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 기타 |
교전국 2 지휘관 | [[파일:Spqrstone.jpg|20px]]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파일:Spqrstone.jpg|20px]]파비우스 [[파일:Spqrstone.jpg|20px]]마르켈루스 [[파일:Spqrstone.jpg|20px]]스키피오 기타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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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 |
전체 | 포에니 전쟁 |
날짜 |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2년 |
장소 | 이탈리아 시칠리아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갈리아 그리스 |
결과 | 로마의 승리 |
교전국 정보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아이톨리아 동맹 페르가몬 |
교전국 2 | 카르타고 시라쿠사 마케도니아 왕국 |
주요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파비우스 막시무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티베리우스 셉티미우스 롱구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마시니사 미누키우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교전국 2 지휘관 | 한니발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 시팍스 대 한노† 대머리 하스드루발 함프시코라† 마하르발 |
이미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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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기록이다. 그는 기원전 167년 인질로 로마에 보내진 그리스인으로,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정 양측의 관점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저술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 현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가 그의 후원자였던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 가문을 다소 우호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도, 그의 기록을 대체로 신뢰한다.
폴리비우스의 기록이 일부 소실된 부분은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록으로 보충한다. 리비우스는 폴리비우스에 크게 의존했지만, 로마 중심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사적 충돌에 대한 묘사는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 로마는 아르노 강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였고, 카르타고는 튀니지를 중심으로 히스파니아 남부, 북아프리카 해안, 발레아레스 제도,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서쪽 절반을 지배했다.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시칠리아 폴리스인 메시나 지배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23년간의 전쟁 끝에 카르타고는 패배했고, 루타티우스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 영토를 로마에 할양했다.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의 내분을 틈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병합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반란을 진압하고, 카르타고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 강화를 위해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진출했다. 그는 히스파니아 남부와 동부에 준군주적 자치 국가를 건설하여 은광, 농업 자원, 인력, 군사 시설 등을 확보했다.
하밀카르 바르카 사후,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과 아들 한니발이 통치권을 계승했다. 226년 로마와 에브로 조약을 체결하여 에브로 강을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쪽 경계로 정했다. 그러나 219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가 로마와 별도의 협정을 맺은 사군툼을 포위, 함락하자,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항의했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로마는 기원전 218년 봄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로마는 포 강 주변 키살피나 갈리아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현지 갈리아 부족들과 갈등을 겪었다. 218년 로마는 포 강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토지를 획득하면서 갈리아인들의 불만을 샀다.
2. 1. 제1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고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의 급료도 지불해야 했다.이는 카르타고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여 기원전 240년 급료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용병 출신 국가들과 카르타고 내 반(反) 카르타고 세력이 결합하여 3년 4개월 동안 이어졌고, 진압 과정에서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한편,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는 용병 반란을 진압하고 히스파니아로 이주하여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기원전 228년에는 히스파니아 동쪽에 '새 카르타고'(현재 에스파냐의 카르타헤나)를 건설하고 바르카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 로마는 시칠리아를 속주로 삼았고, 카르타고가 용병 반란 진압에 집중하는 동안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자국의 영향권으로 만들어 지중해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2. 2.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진출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의 급료 문제로 인해 기원전 240년에는 용병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3년 4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 사이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차지했다.[1]이러한 상황에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는 히스파니아로 눈을 돌려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기원전 228년에는 히스파니아 동쪽에 '새 카르타고'(현재 카르타헤나)를 건설하고 바르카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1] 하밀카르 사후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이 히스파니아 사업을 이어받았으며, 기원전 226년 로마와 에브로 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되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한니발은 어릴 적부터 로마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2. 3. 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
로마는 시칠리아를 속주로 삼았고, 카르타고가 용병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카르타고의 영향력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지중해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일리리아의 해적을 소탕하면서 아드리아해로 진출하고 남하하는 켈트인의 침입에 맞서 북이탈리아, 알프스 이남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기원전 226년, 하스드루발은 로마와 에브로 강 이북으로는 진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맺었다.
기원전 219년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경영하던 한니발은 이베리아반도 동쪽 해안에 있는 사군툼을 침공했다.[1] 사군툼은 에브로 강 이남의 도시였지만,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사절단을 카르타고에 파견했다. 그러나 양측이 협상하는 동안 사군툼 함락 소식이 도착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사절단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는 한니발에게 사군툼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1]
3. 이탈리아 전역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3년)
기원전 219년 한니발은 사군툼을 침공하여 로마에 선전포고를 받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하여 로마를 굴복시키려 했다.
티키누스 전투와 트레비아강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한니발은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할 정도로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여 로마를 고립시키려 했다.
이에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하고 지구전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 세력은 한니발에게 넘어가지 않았고, 로마는 시간을 벌면서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계속 활동했지만,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략을 바탕으로 지구전을 펼치며,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승리하는 등 조금씩 전세를 역전시켜 나갔다.
3. 1.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에게 히스파니아의 통치를 맡기고 카르타고 노바(현 카르타헤나)를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론 강에서의 전투를 거쳐 9월, 한니발은 약 4만 명의 병사와 3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 횡단에 도전했다.[2] 이때 카르타고군이 지나간 루트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 현재에도 여러 설이 분분하다. 9월의 알프스는 이미 겨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추웠고, 켈트족 부족과의 전투도 있어 대군으로 산을 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2만 6천 명(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전투 코끼리는 겨우 3마리로 줄어들어 있었다.[2]
카르타고군은 가을 늦게 알프스 산맥 기슭에 도착하여 15일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기후, 지형, 그리고 현지 리구리아인들의 게릴라전 전술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니발은 11월경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그리고 알 수 없는 수의 코끼리(이베리아를 떠났을 때 37마리였던 코끼리 중 살아남은 코끼리들)를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에 도착했다. 로마군은 이미 동계 주둔지에 들어가 있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반도 기습 진입으로 로마의 그 해 작전 계획, 즉 아프리카 침공 계획이 취소되었다.[1]
3. 2. 한니발의 초기 승리
기원전 219년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경영하던 한니발은 이베리아반도 동쪽 해안에 있는 사군툼을 침공했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보병 4만 명, 기병 8,000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로마는 즉시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로 나누어 보냈다. 한니발은 로마의 허점을 찔러 갈리아를 가로질러 바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이르렀다. 험준한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으로 줄었다.
그해 11월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티키누스에서 처음 만났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기병에 밀려 패했고[1] 이어서 트레비아강 전투에서도 기병과 보병이 모두 맞붙었으나 한니발의 전술에 밀려 로마군은 대패했다.[1] 이로써 로마는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 지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인 기원전 217년 4월,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 로마군은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할 만큼 괴멸적 타격을 입고 패했다.[2] 이 전투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도 잃었다. 이제 로마가 바로 코 앞에 있었지만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쳐들어 가지 않고 로마의 주변 도시를 공격했다. 이는 로마의 연합세력을 차례로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로마를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으려는 전략이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직후 카르타고군은 적대적인 타우리니족(현대 토리노 지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식량을 확보했다. 기원전 218년 11월 말, 카르타고 기병대는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와 경보병을 격파했다. 그 결과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카르타고 편에 가담하여 한니발의 군대는 4만 명이 넘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에 주둔하던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한니발과 대치하던 병력과 합류하도록 명령하여 아프리카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셈프로니우스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이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전투를 유도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을 포위했고 4만 명 중 1만 명만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키살피나 갈리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한니발은 겨울 동안 갈리아인들 사이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갈리아인들은 대거 그의 군대에 합류하여 병력을 5만 명으로 증강시켰다.
패배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충격이 있었지만, 셈프로니우스가 도착하여 관례대로 집정관 선거를 주재하자 진정되었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은 로마군과 라틴 동맹군으로 추가 군단을 모집하고, 카르타고군의 습격이나 침략에 대비하여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를 증원했으며, 타렌툼 등지에 비슷한 이유로 수비대를 배치하고, 60척의 퀸쿠레메스 함대를 건조했으며, 그 해 말 북쪽으로 진군할 준비로 아리미눔과 아레티움에 보급 기지를 설립했다. 각각 4개 군단으로 구성된 두 개의 군대(로마군 2개, 동맹군 2개)가 편성되었는데, 평소보다 강력한 기병대가 포함되었다. 한 군대는 아레티움에, 다른 한 군대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주둔하여 한니발의 이탈리아 중부 진격을 저지하고 키살피나 갈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기원전 217년 초봄, 카르타고군은 어려운 길이었지만 방비가 허술한 길을 통해 아페닌 산맥을 무사히 넘었다. 한니발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주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해 그들이 보호하도록 파견된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이는 플라미니우스를 성급한 추격으로 이끌었다. 한니발은 매복을 설치했고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로마군을 완전히 격파하여 플라미니우스를 포함한 1만 5천 명의 로마인을 사살했고, 1만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다른 로마군의 4천 명의 기병대도 움브리아 호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멸했다. 로마인 포로들은 혹독한 대우를 받았지만, 포로로 잡힌 라틴 동맹군은 카르타고군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카르타고의 무력과 그들의 대우에 대해 좋은 말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한니발은 이러한 동맹군 중 일부를 탈영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3. 3.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 카르타고와 로마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한니발은 자신이 원하는 위치와 때를 골라 전투를 벌였고, 칸나이에서도 일부러 지는 척하며 로마군을 자신이 유리한 칸나이 평원까지 끌어들여 싸웠다. 로마군의 전력은 8만 4천에서 7천 명가량, 한니발의 군대는 5만 명 가량이었다. 로마군은 이러한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의 전술에 휘말려 괴멸했다.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의 교과서적인 전투로 역사상 유명한 전투로 손꼽힌다.기원전 216년 8월 2일, 아풀리아(Apulia) 지방 칸나이(Cannae) 근교에서 양군은 대치하였고, 당일 지휘관인 바루스(Varus)의 결단으로 로마군 약 8만 명(그중 1만 명은 진지에 남았다)은 카르타고군 약 5만 명에 결전을 걸었다. 전투 초반에 카르타고군 좌익 기병은 로마군 우익 기병을 격파하였다. 이어 로마군 후방을 우회하여 반대편으로 돌아들어가 우익 기병과 로마 기병을 포위 공격하였다. 로마군 중앙은 카르타고군 중앙에 맹공격을 가하였으나, 전투 전 한니발이 활 모양으로 보병 전열을 배치했기 때문에, 점차 밀리면서도 버텼다. 카르타고군 보병 전열 양익에 배치된 베테랑 아프리카 용병들은 호각의 전투를 벌였고, 로마군 중앙은 V자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로마 기병을 격퇴한 카르타고 기병이 보병 전열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완전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밀집하여 중앙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였고, 더 나아가 외곽에서 점차 학살당하며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섬멸되었다. 로마군의 피해는 사상자 6만 명, 포로 1만 명이라는 막대한 것이었으며, 집정관 파울루스(Paulus)와 약 80명의 원로원 의원들도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완전 포위를 성공시킨 최초의 전례이며, 또한 자군의 배 이상 되는 적군을 포위 섬멸한 희귀한 전례이다. 한니발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양군 사이의 평야에서 전투를 받아들였다. 로마 군단은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한니발의 중앙을 돌파했지만, 양익의 리비아 중보병이 그들의 진격을 포위하여 측면을 위협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좌익을 지휘하는 카르타고 기병대는 맞은편 로마 기병대를 격파하고 로마군 후방으로 돌아가 다른 쪽 익의 기병대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카르타고 보병은 하스드루발이 뒤에서 군단을 공격할 때까지 버텼다. 결과적으로 로마 보병은 탈출할 방법이 없이 포위되었다. 적어도 6만 7천 5백 명의 로마인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3. 4. 로마의 반격과 전선 교착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고 지구전 전략을 채택했다.[2]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려 했으나, 로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2] 로마는 시라쿠사와 마케도니아에서도 카르타고 및 그 동맹 세력과 맞서 싸웠다.[2] 시라쿠사 공방전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11년 로마가 승리했다.[2]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승리로 명성이 절정에 달했지만, 로마와 동맹 도시들의 결속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는 한니발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2] 기원전 217년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마케도니아 함대는 이탈리아 반도에 도달할 수 없어 한니발을 직접 지원할 수 없었다.[2]
로마는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을 채택하여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고, 시칠리아 섬과 히스파니아 등 카르타고 주변을 공격하여 외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했다.[2]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락쿠스는 "노예 군단"을 조직하여 한니발 포위망을 담당하게 했다.[2] 또한, 우세한 해군력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위협하고,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을 차단했다.[2]
기원전 215년 시라쿠사와 카푸아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도 한니발과 공동 투쟁을 선언했다.[2]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의 강화 제의를 거절하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파비우스 전술 체제로 돌입했다.[2] 한니발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군단을 쪼개어 지구전을 펼치면서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고립시키는 전술이었다.[2]
기원전 213년 파비우스는 카르타고 동맹 도시인 아르피를 점령했다. 기원전 212년 한니발은 실라루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궤멸시켰다. 같은 해 후반, 한니발은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또 다른 로마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211년 카푸아는 정치적 자치권을 박탈당하고 로마의 관리 아래 놓였다.
기원전 210년 카르타고군은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크게 격파했다. 기원전 209년 로마군은 카누시움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타렌툼을 배신으로 함락시켰다.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으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지원군이 없어진 한니발의 군대는 브루티움으로 철수해야 했다.
기원전 205년 한니발의 동생 마고 바르카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서부 게누아에 상륙했다.[2] 기원전 204년 한니발은 크로토네 전투를 치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2] 기원전 203년 마고는 인수브리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4. 이베리아 전역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6년)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승리하고 있을 때, 히스파니아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의 배후 기지인 카르타고 식민지를 상대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1]
4. 1. 스키피오 가문의 활약
초기 이베리아 전선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루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이끌었다. 이들은 히스파니아에 파견되어 현지 부족들의 지지를 얻고, 카르타고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218년 키사 전투(battle of Cissa)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퇴하고, 기원전 217년 에브로 강 전투(battle of Ebro River)에서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기원전 211년에는 사군툼(Saguntum)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바에티스 강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하여 두 형제 모두 전사했다.이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베리아 전선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기원전 210년 히스파니아에 도착하여 뛰어난 능력으로 군대를 장악하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09년에는 히스파니아의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하여 함락시켰다. 기원전 208년에는 바에쿨라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 이후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의 한니발에게 합류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으나,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냈다.
5. 아프리카 전역 (기원전 204년 ~ 기원전 20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에서 로마군 공동 지휘관이었던 전임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다른 공동 지휘관인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의 조카였다.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는 추가적인 로마군 증원부대와 함께 이베리아에 도착했다. 기원전 209년, 신중하게 계획된 공격을 통해 카르타헤나를 점령, 이베리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의 중심지를 장악했다. 그는 막대한 양의 금, 은, 그리고 공성 무기를 손에 넣었고, 포로로 잡힌 주민들을 석방하고 카르타고인들이 억류했던 이베리아 인질들을 석방하여 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기원전 208년 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바에쿨라 전투에서 스키피오와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대부분의 군대를 철수시켜 로마군의 추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손실은 대부분 이베리아 동맹군에서 발생했다.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이 그의 쇠약해진 군대를 피레네 산맥의 서쪽 고개를 통해 갈리아로 이동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원전 207년, 갈리아에서 대규모로 병력을 모집한 후, 하스드루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그의 형인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지만, 그 전에 패배했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인과 이베리아인으로 구성된 4만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5만 4천 5백 명의 카르타고 군대와 코끼리 32마리를 물리쳐 이베리아에서 카르타고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후 이베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카르타고가 점령한 도시인 가데스는 로마에 항복했다. 같은 해 말, 로마군 내 반란이 발생했지만, 스키피오에 의해 진압되었다. 기원전 205년, 마고는 로마 점령군이 또 다른 반란과 이베리아인들의 봉기에 흔들리자 누에바 카르타고를 탈환하려 했지만, 격퇴당했다. 마고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떠났으며, 기원전 203년, 로마의 명목상 통제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이베리아에서 최소 4,000명의 용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13년, 북아프리카의 강력한 누미디아 왕 시팍스가 로마에 가담하자, 카르타고군이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로 파병되었다. 기원전 206년, 카르타고는 시팍스와 여러 누미디아 왕국을 분할함으로써 자원 낭비를 막았다. 그 과정에서 몰락한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는 로마에 의지하게 되었다.
5. 1.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귀국한 스키피오는 기원전 205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공격하여 전쟁을 끝내고자 했으나, 원로원은 이를 반대했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기원전 204년 프로콘술(전 집정관) 자격으로 북아프리카의 우티카에 상륙했다.[1]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과 협력하여 스키피오를 저지하려 했지만, 스키피오는 우티카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1] 여세를 몰아 스키피오는 누미디아를 침공,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누미디아 왕 슈파크스를 사로잡았다.[1] 이후 스키피오는 자신의 보호하에 있던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를 왕으로 즉위시켜 아프리카에서 강력한 동맹을 얻었으며, 동시에 카르타고의 강력한 기병 전력을 약화시켰다.[1]
5. 2. 자마 전투와 전쟁의 종결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을 소환하여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과 그의 동생 마고네는 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카르타고로 돌아왔는데, 마고네는 항해 도중 사망했다. 양국의 강화 협상이 거의 이루어질 즈음 협상은 결렬되었고, 기원전 202년 양측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 그리고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대 연합군이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6천 명, 기병 4천 명, 전투 코끼리 80마리로 구성되었고, 로마군은 라일리우스가 좌익,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이 우익을 맡은 기병대 6천 명을 포함하여 약 4만 명의 병력이었다.


한니발은 먼저 전투 코끼리를 돌격시켰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예측하고 부대를 배치했기 때문에 돌격은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포위되었다. 보병의 약 절반이 항복했고, 항복을 거부한 자들은 살해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스키피오의 승리였다. 한니발은 그의 장기인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항복했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6. 전쟁의 결과와 영향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지배력이 확고해졌다.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한니발의 군대는 브루티움으로 철수해야 했다.
기원전 205년, 한니발의 동생 마고 바르카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서부 게누아에 상륙하여 갈리아와 리구리아의 지원군을 얻었으나, 기원전 203년 인수브리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기원전 204년 로마군이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여 승리하고 누미디아 왕국의 충성을 얻은 후,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카르타고로 소환되었다.
기원전 202년 10월,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과 누미디아 연합 기병대가 한니발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로 카르타고는 로마에 평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평화 조약은 카르타고에 매우 가혹했다.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와 일부 아프리카 영토를 잃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군사력도 크게 제한되었다. 특히,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은 카르타고의 주권을 크게 훼손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강대국 지위를 잃고 로마에 종속되었다.
6. 1. 카르타고의 몰락과 로마의 패권 확립
로마가 강요한 평화 조약으로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와 일부 아프리카 영토를 모두 빼앗겼다. 1만 탈란트[1]의 은을 50년에 걸쳐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고 인질도 잡혔다. 카르타고는 전쟁 코끼리를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함대는 10척의 군함으로 제한되었다. 아프리카 외부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프리카 내에서도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카르타고 고위 관리들은 조약을 거부하려 했지만 한니발은 강력하게 찬성했고, 기원전 201년 봄에 조약이 수락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었다.[2] 스키피오는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이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를 상실하고 군사력도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본토는 건재했고, 잠재적인 국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는 배상금이 예상보다 빨리 완납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인들 사이에는 한니발에 대한 공포심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가 복수에 나서기 전에 이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기원전 200년, 필리포스 5세의 일리리아 개입을 구실로 로마는 마케도니아에 침공하여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로마의 우세로 진행되어 기원전 19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항복했다.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동맹을 선언했지만, 사실상 종속 상태였다. 이어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에 의해 마케도니아 왕국은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고, 왕국은 소멸했다.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의 결과, 그리스는 완전히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 후 약 50년이 지난 무렵, 누미디아가 카르타고 영토에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해결책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로마는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하며 이를 명분으로 군단을 파병했다.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146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소의 지휘하에 3년간의 저항 끝에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의 결과, 로마의 지중해 세계에서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6. 2. 전쟁의 유산
로마가 강요한 새로운 평화 조약으로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와 일부 아프리카 영토를 모두 빼앗겼다. 1만 탈란트1만 탈란트는 약 265조kg에 해당한다.의 은이 50년에 걸쳐 배상금으로 지불되어야 했고 인질도 잡혔다. 카르타고는 전쟁 코끼리를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함대는 10척의 군함으로 제한되었다. 아프리카 외부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프리카 내에서도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카르타고 고위 관리들은 조약을 거부하려 했지만 한니발은 강력하게 찬성했고, 기원전 201년 봄에 조약이 수락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스키피오는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로마의 아프리카 동맹국인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은 카르타고의 전쟁 금지 조항을 이용하여 반복적으로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하고 빼앗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지 50년 후인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는 하스드루발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하여 조약에도 불구하고 마시니사와 싸웠다.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참패했고, 로마의 반카르타고 세력들은 이 불법적인 군사 행동을 구실 삼아 응징 원정을 준비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 말에 대규모 로마 군대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카르타고를 포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46년 봄, 로마군은 최후의 공격을 개시하여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5만 명의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전의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가 되었다. 카르타고 옛 터가 로마 도시로 재건되기까지는 1세기가 걸렸다.
기원전 200년, 필리포스 5세의 일리리아 개입을 구실로 로마는 마케도니아에 침공하여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로마의 우세로 진행되어 기원전 19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항복했다.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동맹을 선언했지만, 사실상 종속 상태였다. 이어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에 의해 마케도니아 왕국은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고, 왕국은 소멸했다.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의 결과, 그리스는 완전히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의 결과, 로마의 지중해 세계에서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7. 주요 인물
제2차 포에니 전쟁에는 양측의 주요 인물들이 참전했다. 카르타고는 주로 외국인 용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구성했으며, 북아프리카 출신 "리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대형 방패, 투구, 짧은 검과 긴 자루 창으로 무장한 밀집 대형 보병, 창으로 무장한 경보병, 밀집 대형 충격 기병, 누미디아 출신 경기병 등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리비아 중보병과 시민 민병대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으며, 일부 보병은 노획한 로마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이베리아와 갈리아는 경험 많은 보병과 기병을 제공했는데, 이들은 맹렬하게 돌격했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후퇴하는 경향이 있었다. 갈리아 기병과 일부 이베리아 기병은 갑옷을 착용하고 밀집 대형으로 싸웠고, 대부분의 이베리아 기병은 경기병이었다. 발레아레스 제도에서는 투석병을 모집했으며, 카르타고는 전투 코끼리도 사용했다.
로마 시민 남성은 대부분 군 복무 의무가 있었고, 보병으로 복무했다. 부유한 기사 계급은 기병대를 구성했다. 로마는 전쟁 시 보병 4,200명[1]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된 네 개의 군단을 소집했다. 이 중 약 1,200명은 경보병 벨리테스였고, 나머지는 중보병이었다. 중보병은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세 계급으로 나뉘었다. 로마 군단병들은 개방적인 진형으로 싸웠다.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군대를 이끌게 했으며, 군대는 보통 두 개의 로마 군단과 라틴 동맹국이 제공하는 비슷한 규모와 장비의 두 군단을 합쳐 편성되었다.
7. 1. 카르타고
카르타고 시민들은 도시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을 때만 군대에 복무했다.[1] 이들은 긴 자루 창으로 무장한 중장갑 중보병으로 싸웠지만, 훈련과 규율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2] 카르타고는 주로 외국인을 모집하여 군대를 구성했다.병사들 중 다수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리비아인"으로 불렸다. 이들은 다양한 유형의 전투원을 제공했는데, 다음과 같다.
리비아 중보병과 시민 민병대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 한니발 부대 등 일부 보병은 노획한 로마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이베리아와 갈리아는 많은 수의 경험 많은 보병과 기병을 제공했다. 이 보병들은 무장하지 않은 채 맹렬하게 돌격했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후퇴하는 경향이 있었다. 갈리아 기병과 일부 이베리아 기병은 갑옷을 착용하고 밀집 대형으로 싸웠다. 대부분 또는 모든 이베리아 기병은 경기병이었다. 투석병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자주 모집되었다. 카르타고는 전투 코끼리도 사용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토착 아프리카 숲코끼리가 있었다.
7. 2. 로마
대부분의 로마 시민 남성들은 군 복무 의무가 있었으며, 보병으로 복무했다. 부유한 기사 계급은 기병대를 구성했다. 전통적으로 로마는 전쟁 시 보병 4,200명[1]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된 네 개의 군단을 소집했다. 이 중 약 1,200명은 군단병의 장비를 갖출 여유가 없는 가난하거나 젊은 남성들로, 벨리테스라 불리는 경보병이었다. 이들은 창으로 무장하고 여러 개의 창을 원거리에 투척했으며, 짧은 검과 90cm 방패를 휴대했다.[2] 나머지는 몸 장갑, 큰 방패, 짧은 자루 검으로 무장한 중보병이었다. 중보병은 전열, 중열, 후열의 세 계급으로 나뉘었다. 전열은 두 개의 창을 더 휴대했고, 중열과 후열은 긴 창을 지녔다. 군단의 소부대와 개별 군단병들은 개방적인 진형으로 싸웠다.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전쟁 시 군대를 이끌게 하는 것이 로마의 오랜 관례였다. 군대는 보통 두 개의 로마 군단과 라틴 동맹국이 제공하는 비슷한 규모와 장비의 두 군단을 합쳐 편성되었으며, 동맹군 군단은 로마 군단보다 기병이 더 많았다.8. 주요 전투
기원전 | 전투 | 위치 | 결과 |
---|---|---|---|
218년 | 사군툼 포위전 | 사군툼 | 한니발 승리,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
218년 9월 | 론 강 도하 전투 | 론 강 | 한니발 승리 |
218년 9월 | 한니발의 알프스 원정 | 알프스 | 한니발, 이탈리아 침입 |
218년 11월 | 티키누스 전투 | 티키누스 | 한니발 승리 |
218년 12월 | 트레비아 전투 | 트레비아 | 한니발 승리 |
217년 |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 트라시메누스 호수 | 한니발 승리 |
217년 | 아겔 퍼르누스 전투 | 아겔 퍼르누스 | 한니발, 함정 탈출 |
217년 | 게로니움 전투 | 게로니움 | 한니발 승리 |
216년 8월 | 칸나이 전투 | 칸나이 | 한니발 승리, 로마군 포위 섬멸 |
216년 | 제1차 노라 전투 | 노라 | 로마군 승리, 한니발의 로마 진격 저지 |
215년 | 델토사 전투 | 델토사 | 로마군 승리 |
215년 | 제2차 노라 전투 | 노라 | 로마군 승리 |
215년 | 카르누스 전투 | 사르디니아 섬 | 로마군 승리 |
214년 | 제1차 베네벤트움 전투 | 베네벤트움 | 로마군 승리 |
214년 | 제3차 노라 전투 | 노라 | 로마군 승리 |
214년 | 시라쿠사 포위전 | 시라쿠사 | 로마군 포위 시작 |
212년 | 제1차 타렌툼 공성전 | 타렌툼 | 한니발 승리, 타렌툼 탈취 |
212년 | 제1차 카푸아 전투 | 카푸아 | 한니발 승리 |
212년 | 제2차 베네벤트움 전투 | 베네벤트움 | 로마군 승리 |
212년 | 시랄루스 전투 | 시랄루스 | 한니발 승리 |
212년 | 제1차 헬도니아 전투 | 헬도니아 | 한니발 승리 |
211년 | 바에티스 강 전투 | 바에티스 강 | 카르타고군 승리, 로마 장군 형제 전사 |
211년 | 제2차 카푸아 전투 | 카푸아 | 로마군 승리, 카푸아 함락 |
210년 | 제2차 헬도니아 전투 | 헬도니아 | 한니발 승리 |
210년 | 누미스트로 전투 | 누미스트로 | 무승부 |
209년 | 카누시움 전투 | 카누시움 | 무승부 |
209년 | 제2차 타렌툼 공성전 | 타렌툼 | 로마군 승리, 타렌툼 탈환 |
209년 | 카르타고 노바 전투 | 카르타고 노바 | 로마군 승리, 카르타고 노바 함락 |
208년 | 바에쿨라 전투 | 바에쿨라 | 로마군 승리 |
207년 | 글루멘툼 전투 | 글루멘툼 | 로마군 승리 |
207년 | 메타우루스 전투 | 메타우루스 | 로마군 승리, 하스드루발 전사 |
206년 | 일리파 전투 | 일리파 | 로마군 승리 |
204년 | 크로톤 전투 | 크로톤 | 불명확 |
203년 | 우티카 전투 | 우티카 | 로마군 승리 |
203년 | 바그라데스 강 전투 | 바그라데스 강 | 로마군 승리 |
203년 | 킬타 전투 | 킬타 | 로마군 승리 |
203년 | 포 평원 원정 | 포 평원 | 로마군 승리 |
202년 | 자마 전투 | 자마 | 로마군 승리, 한니발 패배 |
참조
[1]
서적
ローマ建国史
[2]
서적
ローマ建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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